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의 정부 (문단 편집) == 정치/사회 == [[새정치국민회의]]는 출범 당시 역사상 가장 적은 의석 수의 여당이었다. 공동 여당인 [[자민련]]과 합해도 130석이 채 되지 않았다.[* 당시 야당인 [[한나라당]]은 160석을 넘는 과반 의석 수를 가졌으나 당시 공동 여당이었던 [[새정치국민회의]]와 [[자유민주연합]]은 당시 79석, 45석 정도에 불과하였다.] 반면에 야당인 한나라당은 단독 의석으로만 과반을 훌쩍 넘기는 상황이었다.[* 1996년,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얻은 의석 수는 139석이었으나 통합민주당을 흡수하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으로부터 의원 빼오기를 강행해 1997년 157석, 1998년 165석까지 늘어났다.] 따라서 책임총리제를 약속하여 [[DJP연합]]을 [[김종필]]과 같이 이끌어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실제로 [[김종필]]을 [[국무총리]]에 내정, 임명하였으나 워낙 당시 야당이었던 [[한나라당]]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서리로 무려 5개월 정도 있었다. 김종필은 총리가 중심이 된 내각책임제를 원했으나 한나라당의 반대가 너무 심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내심 그 정도까지는 허용해주지 않았고 이는 그들의 연합은 끝까지 지속되지 못한 계기가 되게 된다. 헌정사상 이승만, 박정희 정권에 이어 세번째 [[DJP연합|연립정권]]이 꾸려진 정부였고, 실질적인 의미로는 유일한 연립정권이란 평가도 받는다.[* 이승만 정권은 제 이승만 지지정당의 연립이며 결국 [[자유당]]으로 통합되었고, 박정희 정권은 유신 치하 [[민주공화당]]과 비정상적 교섭단체 [[유신정우회]]의 연립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연립정권이라고 보기 어렵다. 2020년 [[문재인 정부]] 때 [[더불어시민당]]도 있지만 더불어시민당은 어디까지나 [[더불어민주당|민주당]]의 비례정당이었기 때문에 연립정부로 보기 힘들다.] [[새정치국민회의]]와 [[자유민주연합]]이 연립을 했지만, 지속되진 못하고 삐걱거리더니 결국엔 깨지게 된다. 때문에 일부에서는 [[DJP연합]]에 의한 [[정권교체]]로 완전한 정권교체는 아니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, 그렇게 따지면 이전 문민정부도 당만 같았을 뿐이지 내부 계파들은 전혀 이념이 다른 세력들이 뭉쳐 만든 정권이란 점에서[* 애초에 자유민주연합 세력이 그 문민정부에 탄압받고 쫓겨난 비주류 세력들이었다.]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. 민주당 역사에도 중요한 분기점인게, 당시 민주당 내에서 비호남권 아웃사이더였던 [[노무현]]이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[[장관]]을 역임하는 등의 커리어를 쌓아 거물 정치인으로 발돋움하여 김대중의 후임 대통령이 된다. 정권 출범 3개월 이후에 있었던 [[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|2회 지방선거]]에서는 DJP연합과 허니문 효과의 위력으로 16개 광역단체 중 공동 여당이 10개를 휩쓸었다([[새정치국민회의]] 6곳, [[자유민주연합]] 4곳). 이후 경제 상황이 호조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1999년 초반까지 줄곧 5~60%의 지지율을 이어갔다. 그러나 1999년 중반에 터진 옷로비 파문으로 인하여 지지율이 50% 아래로 처음으로 내려가게 되었다. 이후 사건이 수습되고 다시 지지율 50%를 이어나가자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[[새천년민주당]]으로 개편한다. 이후 꾸준히 지지율이 유지되자 2000년에 있을 16대 총선에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였으나 결과는 전체 273석 중 야당인 한나라당이 133석,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115석, 자유민주연합이 17석으로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.[* 하지만 완전한 패배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애초에 인구 500만의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 인구 1300만의 영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을 상대로 과반을 저지하고 총 의석의 42%에 달하는 쾌거를 이루어냈고 공동 여당인 자유민주연합과 합하면 사실상 여반야반의 구도를 절묘하게 이루어냈기 때문에 결과가 비슷했던 [[19대 총선]]과 견주어보았을 때 내용상 더 좋은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.] 그리하여 지지율이 최초로 30%대로 주저 앉기도 하였다. 그러나 역사적인 2000년 6월 15일, [[2000 남북정상회담|남북정상회담]]을 계기로 다시 국정지지율이 60%를 돌파하였다. 하지만 이마저도 잠시, 의약분업 사태를 거치며 다시 지지율이 하향곡선을 그렸고 결정적으로 8월 말,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30%로 폭락하였다. 이때 국민의 정부는 최초로 레임덕 초기에 진입하게 된다. 2001년 들어서도 진승현 게이트, 이용호 게이트 등 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정권의 인기가 많이 시들었으며, 2000년 롯데호텔 및 사회보험노조 파업, 2001년 대우자동차 총파업 등지에 공권력을 투입해 폭력진압한 것 때문에 재야세력과 노동자 계층에게도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. 하지만 IMF에서 완전히 졸업하고 계속되는 남북화해 무드 덕분에 그래도 30% 초중반대 지지율을 지키며 국정 운영에 큰 문제는 없는 수준의 지지율을 지켜나갔다. 그러나 2001년 8월, [[한나라당]]이 제출한 [[임동원]] 전 [[통일부장관]] 해임결의안[* 8.15 평양축전에 남측 방문단의 방북을 허용했다는 이유였다.]에 자유민주연합이 동조하면서[* [[새천년민주당]]과 연정 상태였으나 대북관에 관해선 의견 차이가 꽤 있었다.]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[[16대 총선]] 이후 의원꿔주기[* 사실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[[교섭단체]](20석)가 되지 못한 것은 새천년민주당이 [[이인제]]를 내세워 충청권에서 자유민주연합 말살을 시도한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. 이 때문에 자민련은 총선 이후 연합을 유지하지 않으려 했지만 김대중이 자민련에 의원 4명을 빌려주어 자민련이 [[교섭단체]]가 되도록 하였고 김종필이 화답하면서 연합이 지속되게 되었다.]로 간신히 유지되던 [[DJP연합]]이 결국 붕괴되고 만다.[* 새천년민주당-자유민주연합-민주국민당 3당 연합의 의석 합이 과반을 넘어서자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연합을 붕괴시켜 관계를 끊어내 의석 수를 늘리고 충청권 기반을 흡수하려던 [[한나라당]]의 전략이었단 설도 있다. 당시 한겨레21 참조.] [[DJP연합]] 붕괴 이후 새천년민주당은 국회에서 다시 수적 우위를 상실하였고[* 15대 국회 말, 한나라당에서 의원 역빼오기를 통해 국민회의 101석, 자민련 52석으로 과반을 안정적으로 확보했으나 16대 국회에서는 새천년 115석, 자민련 17석으로 과반인 137석에 5석 모자랐고 [[민주국민당(2000년)|민주국민당]](2석)과 탈당파 의원(3석)까지 설득에 성공한 후에야 과반을 차지하게 된다.] 이후부터 사실상 국회에서 한나라당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다. 2002년 초반,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 아들이 비리 사건에 연루된 이른바 홍삼게이트가 터지자 지지율은 20%대로 추락하여 사실상 레임덕에 들어서게 되었다. 이 여파로 [[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|2002년 6월 13일에 있었던 지방선거]]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16개 광역단체 중 11개를 내주며 참패하게 된다.[* 나머지 5곳 중 4곳은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가져갔지만 4곳은 광주, 전남, 전북, 제주. 즉 모두 호남이었다.(나머지 1곳은 자민련의 충남)] 이후 계속 20%대 중반의 지지율을 이어나가다가 여당 [[노무현]]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하게 되자 말년에 지지율이 30%대로 다시 급등했지만 홍삼게이트 판결이 나오자 24%로 내려갔다. 이후 임기 막바지였던 2003년에 대규모 인명피해 사고인 [[대구 지하철 참사]]가 발생하면서 사회 분위기가 암울한 분위기에서 임기를 마쳤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